나의 시9 복사꽃 밭을 지나며 복사꽃 밭을 지나며 노연화 배가 고파서 침을 꿀꺽 삼키고 괜히 흠흠 목청을 가다듬어 보는데 아이고 부끄럽게도 들켜버렸네 저 복사꽃 어쩜 저리 고우냐. 볼이 붉다 내 창백한 허기도 붉게 전염되어 그만 부끄럽다고 변명하기로 한다 한낮에 외간 남자와 눈이라도 맞은 듯 불온한 밀애의 빛깔 두근거리는 심장 늘 가슴 한 쪽이 텅 비어 있었다고 지난겨울 쓸쓸하고 고독했었다고 거짓말 같은 고백이라도 했는지 목덜미 스멀스멀 불그스름한 뺨 이것이 마지막 연애일지도 모른다고 삼류소설 쓰는 낭만쯤으로 치부하고 그것이 영혼의 허기였는지 그렇다 해도 저질러나 보자며 피어나는 저 아픈 교태가 왜 이리도 슬픈지 그 마음이 이해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2020. 4. 8. 배꽃 밭을 지나며 배꽃 밭을 지나며 노연화 눈이 내렸던가 사월 벌판 하얗다 어디쯤에서 당신이 걸어갔는지 듬성듬성 발자국 보이는 듯도 하다 오래 기다렸던 봄꽃 어느 날 떨어지고 푸른 잎 돋아도 나는 못 본 척 그냥 지나가려네 세월처럼 흘러가려네 만나고 헤어지는 일 가고 오는 그 모든 이유도 바람아 묻지 말아라 피어도 그만 져도 그만 슬쩍 곁눈질로 보는 꽃 인연도 그렇게 놓아주려네 2020. 4. 8. 탁,스르륵 탁,스르륵 노연화 아무도 몰라도 괜찮다 아무도 모르면 더 좋겠다 쓰다 남은 이면지 북. 찢어 뜯어놓은 스프링 노트 한 장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심히 휘갈긴 문장 한 줄에 혼자 빙긋 웃음 흘리며 흐뭇해 하며 이런 게 시야. 하고 해탈한 선승 흉내 내듯 가볍게 휙, 휴지통으로 던져도 아깝지 않은 꽃도 그렇게 핀 몸을 잎도 그렇게 틔운 영혼을 탁, 스르륵 놓아버리지 봄, 저 화사한 볕 아래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피고 지는 나의 시도 나의 삶도 눈물나게 어여쁜 것이니 열심히 살아가고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마저도 어여쁘니 해탈이 뮈 따로 있겠는가 미련없이 탁, 스르륵 놓아버리는 던져버리는 즐거운 놀이인 걸 2020. 4. 8. 벚꽃 환생 벚꽃 환생 노연화 이번 생은 망했어, 이 말이 위로가 될 줄 몰랐다 망한 생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다 내려놓으니 편했다 다음 생에는 아무것으로도 환생하지 않을 거야 꽃으로도 태어나지 않을 거야 환생은 아무나 하나 공덕도 없이 적멸하려는 심보 엎치락뒤치락 잠도 안 오는 벚꽃 날리는 사월 어느 날 밤 유성우 길게 꼬리를 끌었다 강원도에는 사월 폭설이라는 뉴스가 쏟아졌다 2020. 4. 8. 이전 1 2 3 다음